한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희로애락의 깊이나 정도는 각 개인마다 큰 차이가 있지만, 아마도 사람들은 망각이라는 강력한 지우개로 지난 어려움이나 슬픔들을 거의 대부분을 지워버리기 때문에 또 다시 새로운 즐거움과 웃음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월의 파고속에서 지난 일들을 잊어버리는 과정이 없다면 우리네 사람들은 불행한 기억에서, 슬픔에 잠겨, 또는 고민에 갇혀 음울한 일생을 보낼 것 같다.

의과대학 졸업 후 몇 년간의 피부과 교수를 하다가 개업을 하게 되었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른 시술은 하지 않고 털만 뽑는 다소 생소한 클리닉을 오픈하였고, 털을 뽑는 다양한 부위중에서도 좁은 이마의 털을 뽑아서 이마선을 바꾸어줌으로써 얼굴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시술을 주로 하는 의사가 되었다. 이마선 교정시술 과정중 시술 전후 시술 받는 분들의 이미지 변화를 체크하여 시술 효과를 높이기 위해 다소 번거롭고 사진 정리등의 보이지 않는 작업이 필요한 시술전 얼굴 사진을 찍어놓는 과정이 있다. 한번은 시술 받은 분이 시술을 받기 전 자기 얼굴 사진을 볼 수 있는 지를 물어오셨고 별 생각없이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시술 전 자기 자신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서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이마선 교정의 폭은 얼굴 이미지 변화가 아주 뚜렸한 정도여서 자신의 시술전 얼굴 이미지를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잘 각인하고 있을 자신의 지난 25여년간의 얼굴 모습을 불과 반년만에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조물주가 우리네 인간의 기억력에 망각이라는 도구로 활력을 불어넣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수십년간 매일 보아온 자신의 얼굴도 불과 몇 달만에 잊어버리는데 하물며 남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보통 기억이라고 하면 머리속에 그 형체를 그려보거나 구체적인 단어를 떠올리는 것이지만, 유독 사람에 대한 기억은 구체적이라기 보다는 상당히 감성적이어서 느낌이나 추억, 입었던 옷, 행동, 함께 나눴던 대화 내용등이 떠오르고 다른 사람의 눈, 코 입등의 하나 하나의 구체적인 부위나 모습은 오히려 잘 그려지지 않는 면이 있다. 다시 만나면 전체적인 이미지나 모습으로 누구인지 알아볼 수는 있지만, 알아보는 것만으로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느껴진다.

인간사의 회자정리속에서 미워하거나 불편했던 관계는 오히려 빨리 그리고 쉽게 기억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는 우리 기억력의 불완전성이 인간을 힘든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한 조물주의 특별한 장치이자 인간사회가 다양성을 가지게 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드라마에 갈등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평생을 잊지 못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젊은 커플을 부모들이 억지로 떼어 놓으려는 시도도 인생의 선배인 부모들은 타의에 의해 억지로 헤어지더라도 결국 다 잊어버리고 언젠가는 또 다른 새로운 사람을 찾아가게 된다는 것을 지난 삶을 통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급변하는 과학 기술의 발전은 많은 부분에서 이런 인간의 망각을 저지하여 만나지 못해도 만나는 것과 같은 상황을 유지시켜 과거와는 또 다른 형태의 관계도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 불과 5년전만 해도 사진의 보관 정리상의 어려움으로(슬라이드로 출력하여 개인별로 보관하는 작업은 수월한 작업이 아니었다.) 사진 찍기를 포기했었지만 얼마전부터는 모든 사진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보관뿐만 아니라 정리도 수월하여 이제는 모든 환자분들의 정리된 사진을 시간이 나면 모니터에 띄워서 보면서 시술한 디자인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군대를 가면 여자친구는 고무신을 꺼꾸로 신는다는 말도 이제는 핸드폰과 다양한 통신수단으로 옛말이 되어가고 있고,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나 연인도 이메일과 디지털 사진, 핸드폰, 화상 통화, 유비퀴터스 환경 등의 문명의 발달로 각 개인의 의지에 따라서 인간이 가진 기억력의 부족함을 메꾸어 오래 유지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어 “안보면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숙어는 멀지 않아 사전에서 사라지는 사어가 되지 않을까 싶다.

미용치료로 얼굴의 일부 모습이 변화한 분들 중에서 객관적으로 시술 전보다 긍정적인 많은 변화를 얻은 분들조차 시간이 지나면 치료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일면 위의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능력이 좋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요즈음 성형중독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는데 이분들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꼭 다시 성형을 해야 하는 이유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개선된 이미지를 잊어버리고 또 다른 욕구가 생겨서 다시 시술을 받으시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즐거운 기억들과 그 사람의 이미지이지 외모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되새겨 본다. 오늘도 좁은 이마를 넓히는 시술을 하면서 나는 얼굴모습을 바꾸는 의사일까 이미지를 바꾸는 의사일까 생각해본다.